하인리히 뵐,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열린책들, 2011)
1953년 작품.
플롯을 간단히 사건의 구조라고도 한다. 어떤 플롯 위에 얹혀 있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스릴러가 될 수도 있고, 미스터리가 될 수도 있다. 사건으로 이루어지는 플롯 뒤에는 정서적 흐름으로 이루어지는 또 다른 플롯이 있다. 독자가 소설이 이끄는 감정, 기분, 느낌, 예감 등의 정서적 흐름에 자연스럽게 반응하고 설득되면, 소설은 근사한 예술이 된다.
하인리히 뵐의 소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이와 같은 정서적 플롯을 기가 막히게 잘 엮고 있다. 보통은 사건의 플롯이 정서적 플롯보다 더 다양하지만, 이 작품은 정서적 플롯이 사건의 플롯을 압도한다. 그래서 인물이 겪고 있음 직한 감정의 심연까지 독자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따라 움직인다. 정말 섬세한 소설이다.
전후 독일의 폐허 속에서 지성은 무너졌다. 절망과 죄의식, 허무, 생존의 문제가 날카롭게 드러나면서 인간 감정의 적나라함이 지성과 삶 위에 군림한다. 겪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이 소설을 읽다보면 정말 그런 기분이 느껴진다. 구차하고 수치스럽지만 아이들을 위해, 아내를 위해, 남편을 위해, 사실은 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견뎌야 한다는 절망적인 한계상황이, 소설의 두 주인공인 아내와 남편을 지배하는 것이다.
돈을 빌리러 다닐 때의 수치심, 낯선 여자에 대한 욕망, 아내에 대한 사랑, 고독, 가난에 대한 경멸, 평탄하게 살고 있는 자들에 대한 질투,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 자신이 겪고 있는 불행에 대한 원망, 알코올 한 모금 담배 한 개비에 대한 욕구, 음식에 대한 집착,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오는 평화 그리고 이내 흔들리는 불안, 무기력함, 치밀어 오르는 분노, 슬픔…… 소설을 읽고 있으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정서적 반응을 경험하게 된다. 누군가와 이 소설에 대해서 토론할 기회가 생기면, 매 장면마다 주인공의 감정이 어땠을까? 기분이 어땠을까? 이런 주제를 두고 이야기한다면 밤을 새도 모자랄 것 같다.
전후의 독일. 이런 삶을 살았구나. 그 느낌이 생생하게 와 닿는다. 훌륭하고 탁월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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