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장르의 탄생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시대를 반영하는 새로운 정신이나 유행, 정서적 체험이 특정한 이야기 양식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단일 작품이 아닌, 다수의 작품이 공유하는 어떤 형식을 구현해낼 때, 그것은 장르가 되는 것이다. 로맨틱 코미디, 연쇄살인극, 좀비이야기 등이 모두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 같다.
이와 대조적인 순문학작품(장르문학이라고 하지 않은 문학)은 장르문학과는 달리, 작가의 문제의식이 어떤 전형적인 형식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작가의 자유로운 개인성 위에 단일한 작품으로 구현되기 때문에 독특한 개성을 가진 문학이 된다.
나는 이 두 가지 유형의 문학이 위계적이지 않고 단지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두 문학양식은 우열을 비교할 수 없고, 서로 침투할 수도 있다. 두 가지 양식을 비교할 만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두 양식이 추구하는 목적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예술의 최고 수준에 도달하는 것. 과학과 철학, 사회과학이 말해줄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삶의 질서. 그러니까 자연에 속한 생명과 문명에 속한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가 만들어내는 온갖 체험과 그것이 유발하는 정서적 혼란을 이야기로 녹여 표현하는 것이 그것이다. 결국에는 장르문학과 그렇지 않은 문학을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이란, 단 한 가지일 수밖에 없다. 얼마나 문학성이 뛰어난가?
그럼에도 우리가 두 양식에 속한다고 편의상 분류하는 작품들 사이에서 수준의 차이를 자주 목격한다면, 그것은 슬프게도, 단지 작가의 역량 때문에 발생하는 간극일 것이다. 범죄, 법정 스릴러의 최고봉인 도스또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나 해양 모험극의 대명사인 허먼 멜빌의 <모비딕>은 장르문학이면서 문학성을 인정받은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장르문학’, ‘순문학’이라는 구분법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비장르문학에 둔 사람들만이 위의 두 작품을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고 신기루다.
리처드 매드슨의 1954년 작 <나는 전설이다>를 통해서 편의상 장르문학이라고 부르는 문학의 특징이 무엇이고, 이 작품이 얼마나 중요한지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나는 전설이다>가 뛰어난 이유는 기존 드라큘라-뱀파이어 장르에, 새로운 해석과 시대정신을 불어넣어 다른 차원으로의 발전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전쟁과 종말, 인간성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나는 전설이다>의 과도기적인 좀비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전설이다>를 읽기 전에는 이 작품이 드라큘라의 연장선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도 드라큘라에 대한 언급은 없었던 것 같다.
영화에서와는 다르게, 소설의 주인공은 끊임없이 드라큘라와의 연관성 속에서 괴물들을 설명할 수 있는 과학적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그래서 자신이 세운 가설이 마늘, 십자가, 빛을 싫어하는 특질과 흡혈 등을 설명할 수 있는지 꼼꼼하게 검토한다.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잠시 거슬러 올라가면, 드라큘라 백작이 훈족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대목이 나온다.
드라큘라, “사람들은 인간 늑대들이 왔다고 생각할 정도였소. 이 지방에도 그들이 왔었는데, 여기에서 우리의 선조인 훈족과 마주쳤소. 훈족은 격분에 휩싸여 사나운 불길처럼 이 땅을 휩쓸었소. 오죽하면 멸망해가는 부족들이, 훈족의 핏줄에는 스키타이에서 쫓겨난 사막의 악마와 결합한 저 마녀들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겠소.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아틸라 왕의 위대한 혈통을 그깟 악마나 마녀 따위와 비교한다는 게 말이나 되오? 우리의 이 혈관에는 아틸라 왕의 피가 흐르고 있소.” (46쪽)
드라큘라는 한때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침입자 훈족과 아틸라 왕에 대한 공포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유럽인들이 당시에 체험했던 공포가 드라큘라라는 독특한 캐릭터 장르의 유행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보다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약간의 변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시무시한 공포의 상징인 드라큘라가 한편으론 유럽문명의 상징인 십자가를 무서워하도록 설정된 것, 그리고 유럽의 과학과 지성이 드라큘라를 격퇴한다는 줄거리가 바로 그것이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소원성취’인 셈이다. 이렇게 탄생한 드라큘라는 뱀파이어 장르라 불리며 수많은 작가와 감독에 의해서 재현되고 있다. 장르는 특정 시대의 정서적 체험에 대한 기억이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드라큘라는 여전히 신비적으로 주술적인 의미로만 남아 있었다. (물론 이것이 바로 드라큘라의 매력이지만.)
리처드 매드슨은 자신이 체험한 전쟁 전후의 시대정신을 드라큘라에 반영함으로써 드라마틱한 변형을 시도했다. 그는 드라큘라 현상을 박테리아에 의한 감염이 가져오는 질병으로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학적 설명은 드라큘라를 신비적 존재가 아닌,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는 무엇으로 만들어버렸다. 드라큘라를 과감하게 일상의 세계로 데려온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원래 드라큘라가 상징했던 ‘이민족, 이교도, 나와는 다른 이질적인 존재’라는 이미지를, ‘우리 안에 잠재된 또 다른 끔찍한 내적 자아’라는 이미지로 대체했다. 그런 다음 이야기의 줄거리는 핵전쟁과 전염병으로 몰락하는 우리 자신의 초상으로 재해석했다. 드라큘라는 바로 이 과정을 거쳐 좀비로 재탄생한 것이다. 뛰어난 해석이고 창조였다. 작가는 좀비가 신인류의 상징이라고 쓰고 있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새벽의 잿빛 대기 속에서 서로 밀고 밀리면서 있었다. 그들이 떠드는 소리가 마치 수백만 마리의 벌레 소리 같았다. (……) 로버트 네빌은 이 땅의 신인류를 내다보았다. 그는 처음부터 그들에게 속할 수 없는 존재였다. 흡혈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파괴돼야 할 아나테나(가톨릭에서의 저주)이자 검은 공포였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는 고통 속에서도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전설이다> 이후 우리가 즐기고 있는 좀비 장르의 형식 자체에 이처럼 뛰어난 문학적 성취가 숨쉬고 있다. 리처드 매드슨이 자신의 작품에서 성취한 문학적 개성은 단일작품에 갇히지 않고 좀비 장르라는 형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현재의 좀비 소설과 영화는 이와 같은 축복 속에서 장르가 제공하는 편리한 장치들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장르는 이처럼 역사성을 가진다. 이 순간 누군가는 기존의 좀비장르에 변한 시대성을 반영해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장르문학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성을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야기예술에 있어서 장르는 공동의 작업공간인 셈이다.
모든 장르가 이처럼 역사적 맥락으로 설명되는 것일까? 방대한 문제기 때문에, 함부로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을 테다. 다음 기회에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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